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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개항 이후 조선은 서양 열강과 일본의 침탈 대상이 되었고, 이는 자연생태계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조선 호랑이가 트로피 사냥의 대상이 되어 씨가 말랐듯이, 한반도의 식물 자원 역시 연구와 수탈의 경계에서 복잡한 역사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중 구상나무는 한국 고유종으로 세계에 알려졌지만, 오늘날 우리가 로열티를 지불하며 역수입하는 아이러니한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한라산에서 발견된 구상나무의 진실
1917년 10월 31일부터 11월 5일까지, 영국 출신의 미국인 식물학자 어니스트 헨리 윌슨은 제주도 한라산에 올랐습니다. 그는 약 2천여 종의 아시아 식물을 서양에 소개한 저명한 인물로, '차이니스 윌슨'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아시아 식물의 최고 권위자로 불렸습니다. 이때 윌슨을 안내한 인물은 다름 아닌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이었습니다. 나카이는 조선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914년 제주도 및 완도 식물조사 보고서를 시작으로, 1915년 지리산, 1918년 백두산과 금강산, 1919년 울릉도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전역의 식물을 조사한 인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구상나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한라산을 올랐지만, 일주일 동안 함께 숙박하고 식사하면서도 한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구상나무의 신종 명명자가 누가 될 것인가를 두고 보이지 않는 경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정상 부근에 다다랐을 때 윌슨은 구상나무를 확인하고 표본 486번을 확보한 뒤, 오랜 망설임 끝에 나카이에게 "이 나무는 아무리 봐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종으로 보입니다. 나는 이 나무를 오랫동안 연구해 왔고 이제 신종으로 명명할 계획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만만하던 나카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동감한다는 의견을 표했습니다. 나카이는 구상나무와 분비나무를 구분하지 못해 신종 명명자가 되지 못한 사실을 두고두고 억울해했다고 전해집니다.
윌슨의 연구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1910년경 프랑스 신부 포리로부터 표본을 받은 이후 7년간 연구를 거듭했고, 1917년 한라산에서 직접 표본을 채집한 뒤에도 3년을 더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20년 1월 아널드 식물원 저널 1권 3호에 '한국에서 온 신종 침엽수 4가지'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구상나무는 아비스 코리아나라는 학명으로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만약 나카이가 먼저 명명했다면 '아비스 아시아티카 나카이', 즉 한반도가 아닌 아시아 어디에서나 자라는 뜻의 이름이 붙었을 것입니다. 학명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그 생물의 기원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이기에, 윌슨의 명명은 구상나무가 한국 고유종임을 세계에 각인시킨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사랑받는 구상나무
연말이 다가오면 거리는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 차고, 예쁜 조명을 주렁주렁 매단 크리스마스트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그런데 이 크리스마스트리 중 실내에 설치되는 트리와 외부에 설치되는 트리는 서로 종이 다릅니다. 원래 옛날부터 서양에서는 실내외 구분 없이 독일의 가문비나무를 공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가문비나무는 수형이 멋져 크리스마스트리로 제격이었지만, 너무 웃자라고 높이 크는 탓에 실내에 두기가 어려웠습니다. 구상나무가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크기도 적당하고 수형이 멋들어지게 잡히는 덕분에, 이제는 실내에서 사용되는 트리는 거의 대부분 구상나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상나무라는 이름은 제주 사람들이 이 나무를 '쿠살낭'으로 불렀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제주도 방언으로 '쿠사'는 성게, '낭'은 나무를 의미하는데, 잎이 가지에 달린 모습이 마치 성게 가시처럼 생겼다 해서 이렇게 불러왔습니다. 윌슨은 이 제주 방언을 그대로 학명에 반영해 'Korean Fir'로 명명했고, 논문에서 "이 식물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지리산과 화산섬 제주도에 분포하는 종으로 한국 식물 중 가장 흥미 있는 종이며, 수형이 피라미드형이고 수피가 깊게 갈라져 거칠고 포린이 젖혀지는 특징을 갖는다"라고 기록하면서 한국이 유일한 서식지임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구상나무는 전나무 속에 속하는 침엽수로, 한국에는 구상나무 외에도 전나무와 분비나무가 자생합니다. 구상나무는 전나무와 외모가 확연히 구분되지만 분비나무와는 상당히 비슷해 식별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나카이가 처음 제출한 제주도 및 완도 식물조사 보고서에도 구상나무를 분비나무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윌슨의 면밀한 연구를 통해 구상나무는 분비나무와 다른 독립된 종임이 증명되었고, 오늘날 전 세계에서 신뢰 트리로 가장 비싼 가격임에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고유종이 세계적 가치를 인정받은 사례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직면한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로열티를 지불하는 역설적 현실
구상나무가 세계적으로 사랑받게 된 것은 기쁜 일이지만, 우리 입장에서 그리 기뻐하기만 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미 1904년부터 해외로 반출되기 시작한 구상나무의 개량 품종을 우리가 오히려 로열티를 주고 역수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윌슨은 하버드대에 위치한 자신의 연구실에서 구상나무를 품종 개량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특허를 보유해 꽤 많은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한국은 더 멋지게 개량된 구상나무를 로열티를 지불하며 역수입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우리 토종나무를 구하기 위해 로열티를 지급하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도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 자원과 생물자원이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경제적 가치와 직결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윌슨의 연구가 학문적 가치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한국의 식물 자원이 해외로 유출되었다는 사실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학문적 발견을 넘어 국가적 자산 관리의 문제로 이어지는 지점입니다. 참고로 윌슨은 구상나무뿐만 아니라 제주에서 자생하는 삼나무와 왕벚나무도 서양에 소개했습니다. 삼나무를 두고 그는 "중년기에 가장 아름다운 나무"라고 소개해 외국인들이 삼나무에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왕벚나무의 경우는 더욱 복잡한 논쟁을 낳았습니다. 윌슨은 일본 식물인 오시마 벚나무와 히간 벚나무의 교배종이라고 주장해 일본 학자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2018년 산림청이 왕벚나무의 게놈을 완전히 해독한 결과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제주도 왕벚나무는 제주에 자생하는 올벚나무를 모계로 하고 벚나무 또는 산벚나무를 부계로 해서 탄생한 1세대 자연 잡종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결국 제주의 왕벚나무는 윌슨의 주장처럼 일본 왕벚나무의 후손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탄생한 별개의 식물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과학적 검증의 중요성과 함께, 우리 고유 자원에 대한 연구와 보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이 이야기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여러 측면에서 조명합니다. 조선 호랑이가 트로피 사냥의 전리품이 되어 멸종 위기에 처했듯이, 식물 자원 역시 제국주의 시대의 수탈과 연구라는 이중적 맥락 속에서 해외로 유출되었습니다. 구상나무는 한국 고유종으로 세계에 알려졌지만, 오늘날 우리가 로열티를 지불하며 개량 품종을 들여오는 역설적 상황은 자연 자원 관리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자연을 단순히 이용하거나 소비하는 대상이 아니라, 보호하고 올바르게 관리해야 할 공동의 자산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YdUKc9YHEvY
